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조훈현 : 바둑 기사, 그에 대해 알아보자.

by kingcong 2025. 3. 20.
반응형

 

조훈현(曺薰鉉, Cho Hoon-hyun)은 대한민국의 바둑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기사 중 한 명이자, 정치인으로도 활동한 인물이다. 1953년 3월 10일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바둑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1962년 한국기원에 입단하며 프로 바둑기사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1966년 일본기원에도 입단하여 일본 유학을 통해 바둑 실력을 더욱 연마했다. 그는 전 세계 최초로 바둑계의 ‘전관왕’이라는 업적을 달성하였으며, 세계 최초로 바둑 국제기전 그랜드슬램을 이룬 전설적인 기사로 손꼽힌다. 그의 우승 횟수는 무려 161회에 달하며, 바둑기사 최다 연속 우승 기록을 보유하는 등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했다.
300x250

바둑계에서의 눈부신 활약 이후, 조훈현은 정치에 입문하여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그는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되며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되었다. 정치계에서도 그는 바둑을 통해 얻은 전략적 사고와 집중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체육 및 문화 관련 정책에 관심을 가지며, 바둑을 비롯한 전통 스포츠의 발전과 보급에 기여했다. 또한, 국회의원으로서 대한민국 체육계의 미래를 위한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 경험이 부족했던 탓에 일부 한계를 보이기도 했으며, 국회 활동 이후 다시 바둑계로 돌아가며 정치보다는 본업인 바둑에 더욱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훈현은 한국 바둑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그의 업적은 후배 기사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 그는 바둑뿐만 아니라 정치, 교육,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을 미치며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현재도 후진 양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바둑이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깊은 사고력을 요구하는 스포츠이자 예술이라는 점을 널리 알리고 있다. 그의 삶은 바둑이라는 한 분야에서 시작해 국회라는 새로운 무대까지 도전한, 끊임없이 성장하는 도전 정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조훈현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정치인

 

조훈현은 한국 바둑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며, 세계적인 바둑기사로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그는 한국 바둑계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제1회 응씨배 세계 프로 바둑 선수권 대회 우승을 통해 국제적인 위상을 높였다. 또한, 정치인으로도 활동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1. 생애 및 바둑 입문

 

조훈현은 1953년 음력 3월 10일(양력 4월 23일)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성장했다. 바둑과의 인연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으며, 9세 7개월 만에 프로 입단을 하여 최연소 입단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전설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입단 당시만 해도 일본과 한국 바둑의 실력 차이는 현격했다. 조훈현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그곳에서 일본 바둑계의 대가인 세고에 겐사쿠 9단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했다. 그는 일본에서도 독보적인 재능을 인정받아 빠르게 성장했으며, 당시 일본 바둑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실력을 증명했다.

1963년, 조훈현은 세계 최초의 국제전화 대국을 펼쳤다. 당시 상대는 일본의 이시다 요시오 초단이었으며, 조훈현의 패배로 끝났지만, 이 대국은 한국 바둑이 국제 무대에 첫발을 내딛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 일본 유학과 성장

 

조훈현은 세고에 겐사쿠 9단의 지도 아래에서 성장했으며, 일본 바둑계에서도 유망주로 손꼽혔다. 세고에 9단은 소수 정예 방식으로 제자를 육성하였으며, 그의 제자 중에는 일본 관서기원 창립자인 하시모토 우타로 9단, 현대 일본 바둑의 개척자 우칭위엔 9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훈현은 세고에 9단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으며, 스승으로부터 깊은 신뢰와 기대를 받았다.

 

일본에서 조훈현은 후지사와 슈코 9단, 아베 9단 등과 교류하며 다양한 바둑 기풍을 익혔다.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성장한 그는 자연스럽게 독창적인 바둑 스타일을 확립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경험은 후일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 바둑계를 이끄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3. 한국 귀국과 군 복무

 

조훈현은 일본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으나, 군 복무 문제로 인해 귀국하게 되었다. 1973년 8월 27일, 공군에 사병으로 입대하며 국내에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한동안 국제 무대에서 활동이 제한되었다.

귀국 후 조훈현은 한국기원에서 활동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일본에서의 생활과 달리 한국 바둑계는 엄격한 위계질서가 존재했으며, 이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오랜 일본 생활로 인해 한국어가 서툴렀던 그는 언어적인 장벽도 극복해야 했다.

 

그러나 군 복무 중에도 바둑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가 배속된 부대의 대대장은 바둑 애호가였으며, 덕분에 조훈현은 기전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다. 단, 패배할 경우 위병소까지 오리걸음으로 돌아오는 조건이 붙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시기 그의 바둑 상대 중 한 명은 드라마 '올인'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차민수 5단이었다.

4. 세계 바둑계의 정점에 서다

 

조훈현은 군 복무를 마친 후 본격적으로 한국 바둑계를 이끌며 세계적인 기사로 성장했다. 1988년, 그는 제1회 응씨배 세계 프로 바둑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 바둑계의 정점에 섰다. 이 대회는 당시 가장 높은 상금이 걸린 국제 대회였으며, 그의 우승은 한국 바둑이 일본과 중국을 넘어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제자인 이창호 9단과의 관계도 흥미롭다. 조훈현은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이며 그의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때는 師弟 관계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은 치열한 라이벌로 변모했다. 이들의 대결은 한국 바둑계에서 '영원한 스승과 제자의 대결'로 불리며 많은 팬들의 관심을 받았다.

5. 정치인으로서의 활동

 

바둑에서 전설적인 업적을 남긴 후, 조훈현은 정치에도 도전했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비례대표로 당선되며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바둑 및 체육 발전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며 스포츠 문화 진흥에 기여했다.

 

그러나 정치 무대에서는 바둑계에서만큼의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국회의원 임기 동안 여러 법안을 발의했으나, 정치적 경험 부족으로 인해 실질적인 성과를 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둑과 체육계 발전을 위한 그의 노력은 평가받고 있다.

6. 조훈현의 유산

 

조훈현은 단순한 바둑 기사가 아니라, 한국 바둑계의 선구자로서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준 인물이다. 그는 바둑의 대중화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했으며, 수많은 후배 기사들이 국제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했다.

그의 제자인 이창호를 비롯하여 많은 기사들이 세계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며, 오늘날 한국이 바둑 강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조훈현의 공헌이 컸다. 또한, 바둑을 통해 사고력과 전략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비록 정치 무대에서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바둑계에서 그의 업적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조훈현은 여전히 바둑 발전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의 존재 자체가 한국 바둑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