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지역감정의 창시자?", 선거판의 여우라고 불렸던 인물, 엄창록에 대해 알아보자

by kingcong 2024. 4. 14.
728x90
엄창록은 마타도어의 귀재, 선거판의 여우로 불렸습니다. 그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지역감정을 선거판에 끌어들인 사람으로 추정되며, 역대 대통령 3명인 김대중, 박정희, 노태우에게 지원 요청을 받은 대한민국에서 유례없는 킹메이커로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320x100

그의 생애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가득합니다.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온면에서 태어나 6.25 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는 조선인민군 징집을 피해 산속에 숨었으며, 중학교 선배 및 학우들과 함께 반공 유격대에 입대하여 유격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그 후 국군에 편입되어 복무하고 제대한 후에는 강원도 인제군에 정착하여 한약방을 개업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1960년대부터 김대중을 알게 되어 정치에 입문했으며, 김대중의 선거 전략을 도왔습니다. 김대중을 도와 1970년까지 10년간 선거를 지원하며 그의 정치 경력을 함께했습니다. 그의 선거 전략은 당시 박정희 세력의 주된 방식을 부수고 당시 여당의 위기상황을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1971년에는 갑작스러운 실종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박정희의 선거 전략이 수정되면서 김대중의 지지율이 밀리던 시점에 엄창록이 실종되었습니다. 이후 박정희가 경상도를 중심으로 지역감정론을 창출하여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등의 전략을 펼치며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 엄창록은 실종 후 한 달 후에 나타났으나, 그 이후 김대중을 피해 도망다녔으며 그와의 만남을 피해왔습니다.

 

지역감정의 설계자로서 엄창록은 한국 정치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 중 하나로 꼽힙니다. 그의 이야기는 전통적인 정치 운동가의 이야기와는 다소 다른, 창의적이고 전략적인 선거 전술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당시에는 여촌야도 성향이 강했으므로 전라도와 경상도에서는 박정희를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도시화가 가장 늦었던 전라도와 강원도는 실제로는 박정희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야당인 민주당 계열로 지지를 바꿔가는 중이었습니다. 이런 지지세의 변화는 전라도와 강원도의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나타난 현상으로, 엄창록의 전략적인 선거 운동은 이러한 변화를 예측하고 그에 맞추어 진행되었습니다.

 

1987년 야권 단일화 실패로 인한 평화민주당 분당으로 지역감정이 더욱 부각되었지만, 사실 이는 이미 그 전에도 전라도에 대한 혐오 감정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과거에도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혐오를 표현하는 사례가 있었으며, 그런 분노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도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엄창록은 지역 감정을 이용하여 선거 운동을 전개했으며, 이는 그가 얼마나 창의적이고 전략적으로 선거를 치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의 능력은 선거 전략뿐만 아니라 선거 후의 대처에도 발휘되었습니다. 실종 전까지 박정희 정권의 선거 부정에 반발하여 국내에서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선거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의 창의적인 전략은 투표 이후에도 발휘되어 박정희 정권의 선거 부정을 예측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엄창록의 이야기는 정치와 선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그의 전술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일생을 소재로 한 영화인 "킹메이커"는 그의 이야기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전략과 능력은 정치사에 큰 반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320x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