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현은 1953년 3월 10일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 조씨이며,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 학력은 서울삼선초등학교, 신메이중학교를 졸업하고, 목포대학교에서 체육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공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 후, 1962년에 한국기원에 입단하고, 1966년 일본기원에서도 활동을 시작했다. 바둑의 세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조훈현은 일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외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바둑계에서 큰 업적을 남긴 인물로, 한국 바둑기사 1위로서 총 161회의 우승을 기록하며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다. 특히 그는 세계 바둑계 최초로 전관왕을 차지하고, 바둑 국제기전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인물로, 바둑기사로서 최다 연속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의 바둑 실력은 국내외에서 인정받았으며, 창의적이고 공격적인 스타일로 많은 후배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바둑 인생 외에도 조훈현은 정치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제20대 국회의원으로 비례대표로 선출되었다. 현재는 무소속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의 정치적 활동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 바둑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조훈현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조훈현(1953년 3월 10일~)은 대한민국의 전설적인 바둑 기사이자 정치인으로, 한국기원의 프로 기사 최초로 九단(구단)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는 1980년대 후반에 제1회 응씨배 세계 프로 바둑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며, 세계 바둑계에서 한국 바둑의 위상을 높였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바둑의 대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창호 九단의 스승이자 멘토로 잘 알려져 있으며, 한때 이창호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1. 조훈현 - 바둑 입문과 성장
조훈현은 1953년 음력 3월 10일(양력 4월 23일),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에서 태어나 목포시에서 성장했습니다. 그의 바둑 입문은 남다른 나이와 시작점을 자랑합니다. 조훈현은 9세 7개월이라는 어린 나이에 프로 바둑에 입문했고,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은 최연소 프로 입단 기록입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비해 이미 뛰어난 기력을 보였으나, 당시 한국의 바둑 환경은 일본에 비해 많이 미비한 상태였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면서 세고에 겐사쿠 九단 밑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세고에 九단은 일본 바둑계의 대선배로, 소수의 제자만을 키워낸 명장으로 유명합니다. 조훈현은 그곳에서 엄격한 훈련과 함께 바둑의 정수를 배우게 되었고, 일본기원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기력이 저평가되고, 일본에서의 훈련 또한 매우 힘든 시간이었으나, 차츰 실력을 쌓아가며 일본 바둑계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일본기원에서의 경험은 매우 중요한 시기였으며, 그는 일본 기원에서의 신예로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바둑을 연구하고 실력을 쌓아갔습니다. 그 시절 일본기원에서의 규칙이나 문화를 경험하면서도, 조훈현은 자유롭고 평등한 분위기 속에서 바둑을 두며 그 기풍을 흡수하게 되었습니다.
2. 국내 복귀와 군 생활
1972년, 조훈현은 귀국하여 군 복무를 시작합니다. 그 시기 조훈현은 한국에서 다시 바둑을 시작하며, 동시에 군 생활을 겪으면서 다양한 어려움을 맞이하게 됩니다. 유학 시절 일본에서 있었던 대우와 달리, 한국에서는 선배들로부터 호칭 문제 등 여러 문화적인 차이를 겪게 되며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 생활 중에도 바둑을 계속 이어가며, 군에서 배속된 대대장의 도움을 받아 여러 대국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조훈현은 더욱 강력한 실력으로 복귀하여 바둑계에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바둑 실력은 빠르게 성장하며, 1974년 최고위전에서 김인을 꺾고 첫 타이틀을 획득하고, 1976년 하찬석 九단을 제압하고 국수 타이틀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의 전성기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3. 전성기와 ‘조-서’ 시대
조훈현의 전성기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는 바둑계의 정상에 오르며, 그 시대 바둑계의 강자들과 치열한 대결을 펼쳤습니다. 1980년 7월, 그는 서봉수의 명인 타이틀을 빼앗으며 전관왕을 달성합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서봉수와의 치열한 대결을 비롯한 ‘조-서 시대’가 지속되었고, 그 후에는 많은 신진 강자들이 등장하여 도전해왔습니다.
특히 1989년에는 세계 바둑 대회인 응씨배에서 중국의 녜웨이핑 九단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 바둑의 세계적인 위상을 확립했습니다. 이 대회에서의 우승은 그에게 큰 영예를 안겨주었고, 한국 바둑이 세계 무대에서 그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낼 수 있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4. 이창호와의 세대 교체
조훈현의 전성기가 끝나고, 그의 후계자로 떠오른 인물이 바로 이창호 九단입니다. 이창호는 1990년에 조훈현의 타이틀을 처음 빼앗으면서 조훈현의 시대가 종료되는 신호탄이 되었고, 이후 이창호는 조훈현을 넘어서는 바둑의 대가로 성장합니다. 이창호와 조훈현은 제자와 스승의 관계였지만, 그들의 관계는 한때 라이벌로 변하면서 바둑계의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조훈현은 한때 "나는 할 만큼 했다. 이제는 창호가 알아서 해주겠지"라는 말을 남기며, 이창호에게 자신의 자리를 넘겨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둑계를 떠나지 않고, 연구에 매진하면서 부활의 기회를 맞이하게 됩니다.
5. 후반기와 재도약
조훈현은 한때 은퇴 후 무관의 제왕처럼 여겨졌지만, 그는 2002년 50세의 나이에 삼성화재배에서 우승하며 다시 한 번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 대회 우승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으며, 나이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뛰어난 실력을 지닌 바둑 기사임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21세기 초반에도 여전히 바둑계의 상위권에 자리하며, 그의 기력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습니다.
6. 바둑 인생의 끝과 그가 남긴 유산
조훈현은 바둑계에 끼친 영향력과 그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 덕분에, 많은 후배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의 바둑 스타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그는 한국 바둑의 선구자로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이창호, 유창혁 등 다른 바둑 기사들이 그의 뒤를 이어 바둑계의 정상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조훈현의 바둑 인생은 많은 이들에게 롤모델이 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바둑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조훈현은 그저 바둑의 대가만이 아니라, 바둑을 넘어선 정신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컸습니다. 그는 바둑뿐만 아니라 후배들에게 삶의 교훈을 주는 존재였으며, 바둑 외적인 측면에서도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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